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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빛, 소리 오두막

유유자적한 신선의 나라 혹은 마음 깊은 곳에서 만나는 신

1974년 6월 3일 독일로 떠나던 젊은 작곡가 파안 박영희의 마음에는 아버지가 만들어 불어 준 대피리, 아버지 손을 잡고 청주 장터를 다니며 접한 민중의 소리와 가락이 깃들어 있었고, 가방에는 을유문고 28번, 이조명인시선 (황병국 편역, 1969년 간)이 들어 있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이 책을 산 날은 1970년 8월 1일”이었다고 밝히는 것을 보면, 책 산 날짜를 적던 옛날 청년 지식인의 손길이 떠오른다. 그 시집은 이제 40년 넘게 들고 다녀 “노랗게 바랜 시집”이 되었고 시집 속에 든 허난설헌, 신사임당, 입백당 김씨는 파안의 오래된 벗으로 작곡가의 음악세계에 들락거리곤 한다.

만남과 선유(仙游)

해방동이로 전후 대한민국에서 자란 파안에게 난설헌의 '빈녀음'(가난한 여인의 노래)은 5백 년이란 긴 시간을 넘어서 조선최대시인 허난설헌과 소통하는 코드였다. 그런 만남을 파안은 비평가 강은수의 표현처럼 "가슴에 품은 비단조각"처럼 만지작거리며 "40년 광야생활"을 보냈다.

2012년 정명화 정경화 자매가 공동예술감독으로 있는 대관령 국제음악제에서 '춤에서 춤으로'라는 주제를 걸고 작품을 위촉하자 허난설헌에 대한 생각을 음악으로 옮겼다. 그렇게 탄생한 '초희와 상상의 춤' (Chohui and her imaginary Dance)은 오보에와 클라리넷과 바순과 첼로를 위한 사중주다. 8월 4일 청평에서 세계첫공연을 한 이래 11월 18일 한국·오스트리아 수교 120주년 기념 공연에서 유럽 첫연주를 하고 11월 29일에는 브레멘에서 앙상블 뉴 바빌론이 독일 첫공연을 했다.

초희, 즉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년 강릉 출생, 1589년 사망)은 조선 중기의 뛰어난 시인이요 화가였지만 당시의 혹독했던 여성 억압적인 현실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간 여성이다. 이 작품의 의도는 그런 그녀의 고통을 호소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나는 그녀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신선과 선녀 같은 우리 전통 민속 문화 속의 성스러운 그 무엇과 소통하려 했다고 생각하고 그런 그녀의 이상적인 세계관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시와 그림이라는 예술적인 행위가 있었기에 그녀는 숨 쉴 틈을 찾을 수 있었고 힘든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세상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그 형상화를 우리는 <신비>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초희는 그 시대의 신비주의자이며 나에게는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남아있다.
-- 2012년 2월 브레멘에서 파안 박영희
한글 번역: 유순옥(Sun-Ok Schulz)

한을 말하지 않고 한을 뛰어넘은 세계를 말하려 한다는 파안의 표현은 역설적이게도 시를 자유롭게 쓰고 생각을 맘껏 펼칠 수 있는 선계의 신비로운 자유 뿐 아니라, 현실의 중력으로 인한 난설헌의 고뇌를 잠시 돌아보게 한다.

음악비평가 강은수는 ‘초희와 상상의 춤’에 관한 평문에서 이렇게 썼다.


“박영희의 작품 제목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그 리듬감. 그녀가 변신하였다. 초희가 추었을 춤을 상상하면서 그녀가 춤을 춘다. 맑은 삼화음을 띄워놓고 그 실 위에 살짝 얹어 선녀처럼 가볍게 춤을 추는 것이다. 초희는 영희이다. 5백 년 전의 난설헌 허초희는 지금의 박영희 자신이다. 영희도 이제는 날고 싶다. 상상 속에서. 음악의 날개로 훨훨” (Ad Lib. IV 음악춘추 9월호)

'초희와 상상의 춤'은 그 사이 작곡가가 재작업하여 '상상 속에서 춤추는 허난설헌(Imaginaerer Tanz einer Dichterin)'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파안은 악기도 알토플륫, 테너오보에, 베이스클라리넷, 첼로로 달리 편성하여 상상 속의 춤 공간을 확장시켰다고 한다.


2013년 1월 23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울트라샬 음악축전에서 앙상블 레셰르쉐 (Ensemble Recherche) 연주로 초연된다. 


사랑과 겸손으로 다다를 빛의 세계

선계라는 해방공간은 기독교식으로 표현하자면 겸허함을 통해 도달하는 자리이며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빛의 세계가 된다.

조선 가톨릭 역사 초기에 순직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편지에서 발췌한 여덟 구절을 가사로 삼은 무반주 혼성 합창곡 '주여, 보소서, 우리의 비탄을 보소서 (Vide Domine, vide afflictionem nostram)'(2007)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에서 여덟 가지 구절을 텍스트로 썼다. "우리가 분노의 그릇이 되지 말고 하느님의 자비의 아들이 되도록" 하는 구절을 비롯하여 인과에 얽매인 인생의 중력을 뛰어넘고자 간구하는 토마스 신부의 마음을 음악으로 형상화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기리는 이 곡은 성금요일 14단계 십자가의 길을 이야기하는, 리스트의 Via Crucis(1878)와 함께 네오스(NEOS)에서 음반으로 내놓았다. (2009)

Der Glanz des Lichts
in memoriam Teresa von Avila (1515 - 1582) und Edith Stein ( 1891 - 1942). Doppelkonzert fuer Violine, Viola und kleines Orchester'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앞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 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에베소서 5장 8-9절.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2006년)

'빛의 열매'는 '높고 깊은 빛'(Hohes und Tiefes Licht)(2010/2011)을 개작한 작품으로 2013년 1월 27일 울트라샬 음악축전에서 초연된다. 이 작품을 헌정하는 에디트 슈타인은 유태인으로서 테레자 폰 아빌라의 자서전(Das Buch meines Lebens)을 하룻밤에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그 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수녀가 되었으며 나치 독일에서 살해되었다.

파안은 에디트 슈타인의 문구를 인용하며 높은 것과 깊은 것에 대한 그의 상상을 표현한다.
"신에게 가까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우리는 마음 깊은 곳으로 더욱 깊고 깊게 내려갑니다. 만남은 결국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만난 신은 다시금 마이스터 에커트가 쓴 것처럼 '높은 곳과 깊은 곳이 다르지 않은' 체험으로 이어진다.

1979 '어미화음'

'소리'(Sori, 1979/1980)가 도나우에싱엔 음악축전에서 초연되고 파안은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소리'에서 이미 파안은 '어미화음 (Mutterakorde)'라는 독자적인 작곡기법을 사용하였다. 막스 니펠러 (Max Nyffeler)는 파안이 1983년 '나의 작곡가 생활에 대한 고찰'이란 글에서 표방한 음악언어의 특성들을 모두 이미 '소리'에서 읽을 수 있다고 확인한다. (www.beckmesser.de)
파안이 개발한 작곡기법 중 가장 핵심이 되는 어미화음은 '독일에서 파안이 배운 여러 기법들을 혼합하여 만든 고유 작곡기법으로 메시앙을 연구하면서 그의 음색변화를 발전시킨 것'(강은수, 작곡가 박영희의 음악세계 - 내 마음의 소리, 2009 예솔 226쪽)이며 이는 서구 비평가의 귀에는 다시금 파안에 깃들어 있는 동양적인 음악요소가 되기도 한다. 어미화음은 최저음과 최고음을 경계음으로 정하고 이 두 경계음 사이 한정된 음역에서 음정을 바꾸고 이조하며 변화하는 일종의 "오두막"(니콜라스 샬츠 교수 표현)이다.

오두막에서 생성되고 울리고 사라지는 음색의 변화와 생성 과정에서 우리가 조선민중의 흔적, 장터에 오간 삶의 향기, 타령과 분절되어 녹아 있는 소리를 꿈처럼 바람처럼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선계로 가는 여행을 시작한다. 아주 사뿐히.


연보

1945년 청주 출생
1965-71 서울대학교 음악대학과 동대학원에서 음악이론과 작곡을 공부
1974 독일학술교류처 (DAAD) 장학생으로 독일유학, 프라이부르크 음대에서 클라우스 후버 (작곡), 브라이언 퍼니후그 (분석), 페터 푀르티히 (음악이론), 에디트 피히트 악센펠트 (피아노) 사사
1980 도나우 에싱엔 축전에서 '소리' (1979/80) 초연. 국제적으로 알려짐

그외 도나우 에싱엔 축전 초연작품: 1987 대형 오케스트라를 위한 '님'(1986/87), 1998 여성부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소원 ...... 보리라', 2007 테너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빛 속에서 살아가면 (In luce ambu
lemus)'

1991 그라츠 예술대학 객원교수
1992 독일 칼스루에 국립음대 객원교수
1994 브레멘 예술대학교 작곡과 교수, 대학 부속 신음악 아틀리에 창설
2011 은퇴

주요수상내용:

1978  스위스 보스윌 국제작곡가대회 1등상
1979  유네스코 작곡 콩쿠르 1등상 (파리)  1980 슈투트가르트 시 주최 작곡 콩쿠르 1등
1980/81 남서독 방송국 하인리히 슈트로벨 재  단 장학 지원

1985  바덴 뷔르템베르크 예술재단 장학 지원

1995  여성예술가상 (하이델베르크 시)

2006 제16회 자랑스런 서울대인 지정 
        국민훈장 석류장 수훈 (대한민국)
2009 베를린 예술원 회원
        제15회 KBS 해외동포상
2011  에술 및 학술 공로 메달 (브레멘 시)

 

풍경 2012년 12월호